이상한 음모론도 있고 해서 배추 밭떼기와 중간 상인, 유통구조 등에 대해 기초지식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배추/김치와 관련한 분야에서 좀 있어봤고, 전국 각 지역의 배추밭에도 가 봤습니다. 클리앙에서 배추 유통구조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 중 저보다 더 많은 배추밭에 가 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현직 김치공장 배추 구매 종사자라면 제가 한 수 접어드리겠습니다만, 신문이나 인터넷 보고 카더라 하시는 분은 이 글을 잘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겁니다.
일단, 배추의 산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월 ~ 2일 : 전라남도 해남배추입니다. 파종은 늦가을에 하고 겨울을 나면서 배추가 출하됩니다. 이미 김장을 한 시기라서 수요가 조금 적은 편이고 수확량도 많아서 1/3 정도는 냉장으로 들어갑니다.
3월~ 4월 초 : 냉장했던 배추가 나옵니다.
4월 말~5월 : 전남/경남에서 시작해서 충남을 거쳐 경기/경북 지역으로 산지가 이동합니다.
6월 : 경기 북부, 강원 낮은 지역, 경북 북부 산지, 이때부터 서서히 고랭지 배추가 나옵니다.
7월~8월 : 강원도 고랭지 배추. 말하자면 정선 같은 지역입니다.
8월말 ~9월 초 : 다시 6월 지역과 겹칩니다.
9월말 ~10월 : 경기, 충북, 경북
11월~12월 : 전라, 경남
대충 이렇습니다. 저도 업계를 떠난지 꽤 오래되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합니다.
그러면 배추 밭떼기란 무엇일까요?
우선 강원도 고랭지 배추의 경우 대부분 깎아지른 산비탈(!)에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는 깡촌이라서 그 산골에 들어가 살지 않는 경우도 많고 땅만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농민A 라고 합시다. 농민 A는 자기 땅에 밭을 만들고 파종을 합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중간상인 B가 접근합니다. 밭떼기로 팔아라. 그러면 농민 A는 예년의 평균이 300만원짜리 밭이면 300만원에 팝니다. 그런데 다 받는게 아니라 30만원만 받겠죠. 계약금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잔금을 받습니다. 잔금을 함께 받기도 하고, 한 일주일 후에 받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격이 폭등하면 위약금 물고 비싸게 주는 곳에 넘기기도 하는 일도 생깁니다.
이게 바로 밭떼기 입니다. 밭을 통째로 파는 겁니다. 농민 A가 바로 B에게 팔기도 하고, 물론 부지런한 농민은 팔지 않기도 합니다. 이제 다음부터는 유통구조입니다.
중간상인 B는 자기가 배추를 키웁니다. 농민 A가 키우는 게 아닙니다. A는 이미 받을 돈 다 받았기 때문에 강릉이나 서울로 떠난지 오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밭에 관심이 없습니다. B가 사람 사서 키워야 합니다. 이제 B는 끝까지 키우거나 혹은 또다른 상인C에게 웃돈을 받고 넘깁니다.
배추가 다 자라면 B나 C는 가락동 시장으로 보내거나 김치공장에 팝니다. 김치공장의 경우 사전에 kg당 얼마를 주기로 계약을 합니다. 김치공장용과 시장용 배추는 모양을 다르게 키웁니다. 공장용은 양이 많아야 되서 무게가 많이 나가고 통이 크게 키우지만, 시장용은 너무 크면 안되고 모양이 예뻐야 합니다. 전문용어로 꽃이 펴야 합니다. 진짜 꽃이 피는게 아니고 배추 트럭에 실렸을 때 꽃다발 처럼 보이는 모양을 말합니다. 아무튼 그렇다보니 공장하고 계약이 되면 무조건 양이 많아지게 키웁니다.
만약 시장으로 보내게 된다면 앞서 말했듯 꽃을 피울 수 있게 키우는게 B나 C의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 트럭에 실어 시장으로 보냅니다. 가락동의 경우 3개의 경매장이 있는데, 이 경매장에 도착하면 어느 밭이고 판매자가 누구인지를 붙인 푯말을 붙여둡니다. 그 동네 작황이나 상황을 경매인들이 꿰고 있습니다. 안그러면 겉은 멀쩡한데 안쪽에 부실한 배추를 실은 트럭에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과 며칠간의 시세를 기준으로 경매인들이 자기가 이익볼만한 금액으로 경매를 합니다.
TV에서 보셨겠지만 경매할 때에는 손가락을 사용하거나 전자기기를 사용합니다. 모든 트럭을 한 경매인이 다 사는게 아니라 몇 개만 찍었다가 삽니다. 경매인 D가 가격을 올리고 싶어도 다른 경매인 E가 자기가 낙찰받은 트럭을 싸게 팔면 D도 싸게 팔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대체적인 가격은 품질과 함께 그 날 시장에 몇 대의 트럭이 올라왔는지를 기준으로 결정됩니다. 아무리 품질이 나빠도 원래 트럭 200대가 들어오는 시장에 10대만 들어왔다면 가격은 천정부지가 됩니다.
경매인 D와 E는 다시 이를 도매인 F에게 넘기거나 바로 김치공장에 넘기기도 하고, F는 이를 다듬어서 나누어 파는 도매인 G에게 넘기거나 자기가 직접 사람을 사서 다듬어 판매합니다. 그리고 일반 소비자나 식당주인 등은 바로 이 F나 G에게 구입하게 됩니다.
단계가 무척 많은 것 같지만, 다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이들입니다. 만약 D나 E가 없다면 경매를 통한 시세 결정은 누가 할 것이며, F나 G가 없다면 트럭에 실린 배추를 누가 분류/정리해서 소매자나 식당/구멍가게 주인에게 팔겠습니까? 결국 다 자기 역할이 있는 것이죠. 물론, 중간상인 B나 C는 불필요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들도 나름의 역할이 있습니다. A의 경작지 면적이 한 트럭 분이 안되는 경우에는 B가 여러 밭을 모아서 트럭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B와 C는 사실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은 어떨까요? 보통 다른 지역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고랭지에 비해 농민 A가 직접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랭지는 말하자면 깡촌이라서 농민 스스로도 거주하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한 철 장사죠. 하지만 다른 지역은 농민들을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밭도 자기가 대대로 가꾸어 온 밭이라서 끝까지 자기가 키워서 시장에 출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땅이 넓은 농민은 자기가 다 관리할 수 없으니, 일부를 중간에 밭떼기로 넘겨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밭떼기의 장점(농민이 보기에)은, 먼저 자기가 일일히 관리하지 않아도 일정한 소득을 보장한다는 겁니다. 5톤트럭 한트럭이 나오는 고랭지 밭을 제대로 수확해서 시장에서 경매 받으면 대략 200만원을 수수료 제하고 받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떤 중간상 B가 와서 내가 130만원 줄께 나한테 팔아라 그러면 어떨까요? 원래대로라면 자기가 비료 뿌리고 물 대고 다 해야 하는데다 몇달간 죽을 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냥 130만원 쥐어준다고 하면 넘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해에 폭우가 내려 배추 농사가 흉작이 들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밭은 피해가 적어서 예년에 비해 80%의 수확을 해냈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면 한 트럭에 200만원이 아니라 천만원을 호가하게 됩니다. 배추 양이 80%밖에 안실려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 상인은 870만원의 순이익에 경작에 들어간 비용을 제한 금액, 그러니까 대략 800만원 정도의 순이익을 보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해에 아주 농사가 잘됐다고 하면, 나만 잘되는게 아니라 대체로 잘되게 됩니다. 그러면 시세가 20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으로 떨어지기도 하죠. 그러면 그 중간상은 무려 100만원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겁니다. 몇달간 고생은 고생대로 해서 손해를 보는 거죠.
하지만 밭떼기로 넘긴 농민 A는 손해볼게 없습니다. 흉작이건 풍작이건 자기는 130만원 받았으니까요.
뉴스에 보시면 "시세가 그렇게 올랐어도 이익은 중간상이 보고 우리는 예년과 동일하다며 눈물짓는 농민" 이 바로 이런 농민 A입니다. 자기가 중간 상인에게 안넘기고 잘 가꿨으면 시장에 팔아서 수천만원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자기가 진작에 밭떼기로 넘겼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그 기사만 보고 중간상인이 무슨 악덕 상인에 악의 표본인 줄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해, 농민A는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아서 최소 적정가를 받고 판매한 것이고, 중간상 B나 C는 리스크를 지고 도박을 한 겁니다. 바로 "도박" 그것이 배추 농사, 그 중에서도 여름 고랭지 배추 농사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농민 A도 그걸 알기에 도박 안하고 조금만 받고 넘기는 것이죠.
물론, 자기가 열심히 농사지어 시장으로 보내는 농민 A1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 이번에 피해를 덜 본 분들은 대박을 쳤을 겁니다. 평생 가야 두 번 오기 힘든 대박일 겁니다. 경기/충청/전라/경남 지역에는 이렇게 자기가 농사짓는 분들도 많습니다. 문제는 이 지역은 워낙 경작지도 넓고 배수가 잘 되서 피해가 적은 편이고, 피해가 있어도 가격이 널뛰기 하는 일은 적다는 겁니다. 그러니 중간상이 밭떼기를 잘 안하죠. 해도 큰 이익 못보거든요. 보통 이런 봄/가을 배추 (경기/충청/전라/경상) 의 경우 초기에 밭떼기를 하지 않고 수확기에 다가가면서 중간상이 밭떼기를 한 후 시장에 올리기도 합니다.
고랭지 배추의 경우 밭떼기 시기도 중요합니다. 어떤 이는 파종 직후에 계약하기도 하는데, 좀 눈치 빠른 농민A2의 경우 올해 배추 시세가 올라갈 것 같다는 느낌이 있으면 바로 밭떼기로 넘기지 않고 좀 관망을 합니다. 운만 맞아주면 일주일 전에 150만원에 팔릴 밭을 일주일 기다려서 3~400만원에 팔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몇트럭짜리 500만원짜리 밭을 3000만원에 팔아서, 100만원짜리 수표 30장 들고 짜장면 먹으러 와서 100만원짜리 수표 내놓고 거슬러 달라고 잘난척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제가 강원도에 배추 보러 갔을 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배추 가격은 보통 4년~5년마다 크게 뛰는 상황이 생깁니다. 중간 상인의 경우 이 시기를 잘 맞춰주어야 나머지 3년을 먹고 삽니다. 안그러면 쫄딱 망하는 것이죠. 타짜 같은데 나오는 그런 걸쭉한 동네 이야기하고 비슷한 분위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IT에 종사하는 도시 직장인 같은 분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죠.
이렇게 여러 사람 명줄이 왔다갔다 하는게 바로 배추 농사 입니다. 배추 농민은 순진 무구한 피해자도 아니요, 중간상인이라고 악의 화신도 아닙니다. 그냥 제각각 자신의 이익에 맞추어 움직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무슨 FTA의 음모 이런건 좀 말이 안됩니다.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걸린 문제를 "조작" 하려면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번 건은 날씨로 인한 흉년, 거기에 군중심리와 정부의 대응 미숙이 복합된 겁니다.
참고로, 여름 배추는 냉장 저장이 힘듭니다. 물이 많고 배추 자체가 따뜻하기 때문에 쉽게 녹아 버립니다. 그래서 강원도 쪽에는 냉장 창고도 없습니다. 반면 늦가을 배추나 겨울 월동 배추는 배추 자체가 차갑고 수분이 적어서 냉장 보관에 용이합니다. 대부분의 배추 냉장 창고는 그래서 나주/무안 같은 동네에 있습니다. 그리고 배추는 최대 냉장 보관이 3-4개월 정도이고 보통 1-2개월 이상은 보관을 하지 않습니다. 더 보관하지도 못합니다. 냉동 보관은 더더욱 안됩니다. 냉동하면 조직이 망가집니다.
이런 저런 말씀 많이 하시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좀 제대로 된 사실 관계를 아시고 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적었습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 중 지난 몇년 사이에 바뀐 내용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주로 시기와 관련된 내용) 그런 부분이 있으면 다른 전문가께서 지적해 주십시오.
-출처: 박스웹 배리님의 글
http://m.boxweb.net/c/clien/list.php?bo_table=lecture&wr_id=6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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